축구사에서 월드컵을 세 번 든 남자
국제 올림픽 위원회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
그는 바로 펠레입니다.
은퇴 후에도 축구 황제로 군림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향년 82세로 고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축구이야기를 한번 써 보겠습니다.
펠레의 축구이야기
축구 황제 펠레의 죽음으로 오늘 축구계는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많은 축구 스타들과 관계자들은 일제히 자신의 인스타그램 등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펠레를 추모하는 글을 올리고 있는데요, 저도 펠레의 축구 인생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유년기
1. 1940년 10월23일 생으로 축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펠레가 그의 이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별명입니다. 아버지 돈지뉴의 친구인 골키퍼 빌레를 어린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못하고 펠레라고 발음하면서 생긴 별명입니다. 하지만 펠레 본인의 자서전에서조차도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적혀있습니다.
2. 그의 원래 이름은 Edson Arantes do Nascimento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입니다. 아버지 돈지뉴가 에디슨을 존경하여 펠레도 에디슨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며, 본인도 에디슨이 누군지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어린시절 자신을 펠레라고 놀리는 동네 아이들과 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3. 펠레가 10살일 때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가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를 위해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켜야 겠다고 예수상 앞에서 맹세하였습니다. 이 날은 브라질을 충격에 빠뜨린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난 날로 브라질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결승 리그 마지막 상대인 우루과이에게 패한 날입니다.
4. 펠레는 바우루AC 유소년 팀에서 산투스 FC 유소년 팀으로 옮기게 되는데 여기서 훈련받으면서 2번 무단이탈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왜소한 자신의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이고 두 번째는 4살이나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하였을 때입니다.
●클럽 시절
1. 펠레는 바우데마르 지브리투의 추천을 통해 1956년 산투스 FC에 입단하였습니다. 입단하자마자 보통 선수들보다 뛰어나서 15살이라는 나이에 SC 코린치안스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친선경기여서 공식리그 기록에는 없는 경기였습니다.
2. 1957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가 두 시즌으로 나뉘게 되어 상위 10팀은 세리아줄로 진출하고 하위 10팀은 셀리브랑쿠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 펠레는 예선에서 14경기 19골, 13승 1 무 5패를 기록하며 전체 2위로 세리아줄로 진출하게 되고 이번시즌에서 38경기 41골을 기록하면서 산투스의 1군의 멤버로 등극합니다.
3. 1959년 8월 2일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펠레는 아주 이쁘고 아름다운 골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이 골은 영상으로 남아있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을 토대로 그래픽으로 재현한 영상만이 남아있는데 보니깐 진짜 특이하게 골을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영상 보러 가기>
4. 1961년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플루미넨시와의 경기에서 펠레 혼자 100mm가 넘는 거리를 드리블해서 골을 넣었다. 이것도 당시 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영상으로 남아있지 않고 사람의 기억을 더듬어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을 뿐입니다. 마라카낭 구장 앞에 청동패를 만들어서 이 골을 기념하고 있다.
5. 1963년 6월에 있었던 인테르와 산투스의 친선경기 중에 인테르 선수의 거친 플레이로 인해 제대로 활약을 펼치지 못했는지 경기도 2:0으로 졌으며 경기 종료 후에 거친 플레이를 한 미드필더 브루노 볼키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두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페어플레이 하는 선수로 알려진 펠레지만 화가 많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6. 1964년 산투스 홈에서 열린 그레미우와의 2차전 경기에서 골키퍼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하게 됩니다. 이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한 펠레지만 골키퍼가 퇴장당하자 펠레가 골키퍼 포지션에 기용되었고 골키퍼 역할도 잘 수행하여 4-3으로 승리를 하였습니다.
7. 1967년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가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48시간 전쟁을 중단시킨 사례가 있었습니다. 전쟁도 중단시킬 수 있는 힘이 펠레에게는 있었습니다.
8. 1969년 11월 19일 바스쿠 다가마와의 경기에서 상대방의 파울로 페널티킥을 얻어낸 펠레는 침착하게 골로 성공시킴으로써 축구 사상 처음으로 1000골을 기록하는 선수로 남게 되었습니다.
9. 1972년 시즌 시작 전 산투스 FC는 여러 나라를 방문해서 친선경기를 가졌습니다. 이때 우리나라도 방문하여 한국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졌습니다. 펠레는 후반 13분에 골을 기록하였고 우리나라도 차범근선수와 이회택 선수가 후반에 두골을 만들면서 3-2로 한국이 졌지만 재밌는 경기를 관중에게 선사하였습니다.
10.1974년 펠레도 나이가 들어 은퇴의 순간이 왔습니다. 펠레의 은퇴경기는 플라멩구와의 친선전이었는데 펠레는 여기서 결승골을 넣으며 1:0 승리로 기분 좋게 산토스 FC에서 은퇴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11.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북미 최초 프로 축구 리그 NASL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펠레를 미국리그로 데리고 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펠레는 거액투자가 망하고 에이전트에서도 사기를 당하는 등 금전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기고 브라질 정부도 펠레를 미국 리그에 뛸 수 있도록 요청한 상황이기에 펠레는 1975년 미국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여 1977년까지 뛰다가 완전히 은퇴하게 됩니다.
12. 은퇴경기에 맞상대는 친정팀인 산투스 FC였다. 어떻게 보면 펠레의 모든 축구인생이 담긴 팀이었기에 펠레는 전반전은 코스모스 유니폼을 입고 뛰었고 후반전에는 산투스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습니다. 최고의 은퇴경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 브라질 국가대표
1. 1940년 브라질 스타플레이어이자 브라질 감독이던 시우 배우 피리유는 1957년 16세에 나이에 산투스 FC의 주전을 하고 있던 펠레에 플레이를 인상 깊게 보고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국가대표로 선발하게 됩니다.
토꺵이 같은 녀석이군. 기회를 주마!!!
2. 1957년에 펠레가 처음으로 A매치를 뛴 경기는 코파로카라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맞붙어 아메리카의 최강자를 가리는 친선대회였다. 여기서 펠레는 경기장을 밟은 지 30분이 지난 75분에 아마데오 카리소를 뚫고 득점을 기록했다. 펠레가 득점을 했지만은 아쉽게도 2-1로 브라질이 아르헨티나에 패하였다. 하지만 2차전 경기에서 펠레가 또 골을 넣고 아우타피니가 추가골을 넣어 2:0으로 승리하면서 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3.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만 17세 나이로 출전하여 월드컵까지 들어 올린 펠레에 활약은 대단하였습니다. 4경기에 출전하여 6골 2 어시스트로 팀 내 1위, 전체에서는 득점 2위, 최연소 헤트트릭, 최연소 득점, 월드컵 역대 단일 대회 토너먼트 최다득점은 아직도 안 깨지고 있습니다.
4. 1862년 칠레 월드컵 조별예선 2차전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멕시코전에서 활약이 대단하여 집중 마커를 당하였고 전반에 왼발로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시도한 후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그라운드에 쓰러졌고 경기를 뛰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브라질 선수들에 나이는 많았고 펠레가 빠지면 기동력에 급격히 저하되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펠레대신 선택할 수 있는 자원이 고른 결과 아마리우드가 선택되었습니다. 그 선택은 옳았고 월드컵 우승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그해 어머어마한 연습경기를 치르다 보니 체력소모가 심해졌고 선수들도 다들 노장에 기량이 옛날 같지 않은 상태에서 출전한 월드컵이었습니다. 연속 2회 챔피언을 차지한 브라질은 우승후보로 거론되어왔지만 헝가리전에서 1954년 이후 월드컵에서 패배가 없던 브라질이 패하고 말았으며. 마지막 3차 예선 포르투갈전에서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이겨야 했기에 펠레는 출전을 하게 되지만 포르투갈 선수 백 주앙 모라이스가 펠레의 다리를 노리고 백태클을 걸었고 넘어졌다가 일어선 펠레의 다리를 향해 노골적으로 태클을 한 번 더 걸어서 펠레는 최악의 부상을 입었으며 심판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펠레에게 최악의 월드컵이 되었고 월드컵 출전을 그만하겠다는 소리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6.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지난 대회와 달리 안방에 컬러로 중계되는 월드컵이었습니다. 펠레는 큰 부상 없이 경기를 치러 나갑니다. 조별예선에서도 3전 3승을 기록하면서 토너먼트에 올라갔고 펠레 또한 예선에서 3골 2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좋은 출발을 보였습니다.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탈리아와 결승전을 치르게 되는 브라질, 이탈리아와의 경기는 팽팽한 접전 속에서 17분 히벨리누는 펠레를 보고 크로스를 올리게 되고 펠레와 부르그니치의 접전 속에서 부르그니치는 손까지 사용하며 막으려고 했지만 펠레의 헤딩슛이 정확하게 골문을 가르면서 팽팽한 접전은 깨지게 되고 그 이후 4-1 큰 격차로 이탈리아를 무너뜨리면서 아직도 깨지지 않은 한 선수가 월드컵 3회 우승하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펠레는 고인이 됐지만 그의 영향력은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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